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무라 헤이타로 (문단 편집) == 버마의 도살자? == 한국과 일본에서는 '''[[버마]]의 도살자(ビルマの屠殺者)'''라고 많이 불리며 버마에서 대량 학살을 저지른 인물로 알려졌다. 왜 한국과 일본 한정이냐면, 영어 등 다른 언어로 Slaughter of Burma를 검색해보면[* 구글 등으로 검색해보면 종교 문제 등으로 끔찍하게 살해당한 사람들의 시체 사진이 나오므로 주의 필요.] 기무라 헤이타로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버마 전역의 한 당사자였던 영국이나 미국 사이트를 찾아봐도 위에서 언급된 대량학살은 거론되지 않으며, 심지어 그의 악행에 가장 피해를 입었다는 '''미얀마측 사이트'''를 뒤져봐도 딱히 당시 일본군의 학살에 대한 기록이 없다. 애초에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기무라 헤이타로가 미얀마에서 100만 명이나 학살한 것이 맞다면 이 규모는 [[난징 대학살]]의 40만 명을 크게 상회하는 숫자인데, 난징대학살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단기간에 4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죽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100만은 어떨까? 이게 맞다면 미얀마 어딘가에서는 유골로 된 땅이 있어야 할 정도로 많은 수의 유해가 있어야 정상이다. 100만 명이 죽었다면 이같은 증거들이 남을 수 밖에 없다. 이정도 규모의 학살이 숨긴다고 숨겨질 수 있을 리도 없고. 다만 중국 측 자료 중에서는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 해외판에서 A급 전범 14명의 죄상에 대해 밝힌 적이 있는데, 여기서 기무라 헤이타로는 '' '''미얀마 전선에서 침탈 행위를 일삼은 책임을 물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버마 전선에서 기무라의 행적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는 편이다. [[https://m.ajunews.com/view/20140126134930845|#]][[https://mnews.jtbc.joins.com/News/Article.aspx?news_id=NB10419730|#]][[http://www.peoplechina.com.cn/maindoc/html/zhuanti/zhanfan/7.htm|# 인민일보 일본어판]][* 중국 측 자료 또한 그 근원이 일본이기 때문에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의견도 있으나, [[중국 공산당]] 기관지씩이나 되는, 꽤나 영향력있는 언론에서 출처도 조사하지 않고 기재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이것이 가짜일 가능성은 요원하다.] 사실 기무라 헤이타로가 일본 본토의 군사참의원에 있다가 버마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1944년 8월은 [[임팔 전투]](1944년 3월~7월)까지 일본군의 패배로 끝났고 이미 버마 전역의 전황은 기울어 일본군이 수세에 몰린 상태이기도 하다. 또한 1945년 3월에는 영국의 지원을 업은 버마 국군이 대규모로 일본군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1945년 5월 수도 [[양곤]]이 연합군에 의해 탈환되는 시점에서 버마 지역 대부분에서 이미 일본군은 축출된 상태였다. 기무라의 부임 시기에 버마에서 발생한 일본군 전쟁범죄로는 1945년 7월 7~8일 버마 원주민 637명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칼라공 마을 학살사건(Kalagong massacre) 정도가 유명하나[* 당시 칼라공 마을 인구가 900~1천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일본군 책임자들이 따로 있어 전부 버마 현지에서 재판받고 처벌받은 사건이었기 때문에 기무라가 최고 사령관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하기는 해도 이 학살과의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물론 극동군사재판에서 기무라는 이 학살을 포함한 잔학 행위를 막지 못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또한 그의 포로학대 사례로 거론되고 실제로 극동군사재판에서 기소되기도 했던 [[죽음의 철도]](1942년 9월~1943년 10월)나 [[바탄 죽음의 행진]](1942년 4월)등의 사건[* 이 쪽은 오히려 [[츠지 마사노부]]와 관련있는 사건이다.]은 전부 그의 버마전선 부임 이전에 발생한 사건이기도 하고, 바탄 죽음의 행진에서 그가 비밀명령을 내렸다는 얘기도 근거가 없다. 즉, [[나무위키]] 등 국내에 유통되던 기무라 헤이타로 정보는 거의 다 일본 웹사이트에서 출발한 소위 [[삼간사우]] 스레드, 다시 말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어난 일본군의 졸전과 비인도적 범죄, 잔학행위는 (일본군 자체에 내재된 문제점이 아니라) 이들 몇몇 무능하고 사악한 일부 장군들에 의해 벌어졌다고 주장하는 출처불명의 일본 인터넷 스레드, 더 거슬러 올라가면 패전과 전쟁범죄의 책임을 몇몇 군장성에 돌리고 싶은 일부 구 일본육군 출신들의 주장에 기원을 두고 있을뿐, 구체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https://en.wikipedia.org/wiki/Burma_campaign|버마 전선(영문)]] 거기에 학살이나 [[위안부]] 관련한 행적과 망언, 주변인들의 평가 등 이전까지 이 문서에 기록되었던 각종 기술내용 중 그 신뢰성이나 1차 근거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리 찾아봐도 전혀 없다.[* 이러한 날조된 에피소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극동군사재판에서 기무라가 '버마 정부는 내게 훈장을 줘야 한다. 내가 버마 인구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지.'라고 말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극동군사재판 당시 기무라는 자신에 대한 변론을 전혀 실시하지 않아 공판 기록에 기무라의 발언은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기무라 헤이타로가 처형된 사유는 버마에서의 행적보다는 그의 육군차관 시절 행적과 훨씬 큰 관련이 있다. 당시 육군대신은 도조 히데키가 겸임하고 있었고 기무라는 육군차관으로서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개전을 조력하였는데, 특히 [[진주만 공습]]에서 관여하였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무라 헤이타로에 대한 판결문([[https://crimeofaggression.info/documents/6/1948_Tokyo_Judgment.pdf|569페이지]])을 보면, 육군차관으로서 그 지식을 활용하여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개전하는데 도움줬다는 점을 길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극동군사재판 관련 자료 어디를 찾아보아도 기무라 헤이타로가 버마에서 대량학살을 벌였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으며 실제로 그게 기무라 헤이타로가 처벌받은 이유도 아니다. [[버마]]에서의 포로학대 혐의도 당시 기무라 헤이타로가 사형 판결을 받은 이유였으나 사실 이는 [[죽음의 철도]] 같은 구체적인 잔혹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 때문이 아니라 종전 당시 일본군 버마전선 최고 책임자로서 처벌받은 상징적인 의미에 가깝다. 왜냐하면 [[죽음의 철도]]는 1942~1943년 10월까지 공사된 것이고 기무라 헤이타로는 1944년 8월 버마에 최초로 부임하였기 때문이다.[* ''Although the Death Railway was built from 1942 to 1943, and Kimura did not arrive in Burma until late 1944, Kimura was also charged with the abuse and deaths of the military and civilian prisoners used to construct the railroad''(비록 [[죽음의 철도]]는 1942년부터 1943년까지 건설되었고, 기무라는 1944년 후반이 되도록 버마 전선에 도착하지 못했지만, 기무라는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동원된 군인과 민간인 포로들에 대한 학대와 죽음에 대한 혐의로 기소되었다.)(영문위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일본에 있던 기무라 헤이타로가 죽음의 철도를 지휘한 증거도 없다. 때문에 [[매사추세츠 대학교]] 역사학과 리처드 마이니어(Richard Minear) 교수는 1970년대에 승자의 정의(Victors' Justice)[[https://en.wikipedia.org/wiki/Victor%27s_justice|#]][[https://www.press.umich.edu/18285/victors_justice|#]]라는 책을 집필하여 [[극동국제군사재판]]의 부당함과 부실함을 비판하였는데, 그 근거 중 하나로서 [[죽음의 철도]] 공사 당시 버마에 있지도 않았고 포로학대를 지시한 증거도 없는 기무라 헤이타로에게 버마에서의 포로학대혐의를 씌워 유죄 판결을 내린 사실을 들기도 하였다. 또한 [[죽음의 철도]]를 둘러싼 공사 당시의 기록과 전후 재판 기록 등 2천페이지에 달하는 1차 사료를 집대성하여 2005년경 출판된 책 The Thailand-Burma Railway, 1942-1946[[https://www.amazon.com/Thailand-Burma-Railway-1942-1946-Routledgecurzon-South-East/dp/0415309506|#]]에서도 기무라 헤이타로의 이름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극동국제군사재판]] 판결문 원문을 봐도, 기무라 헤이타로가 적극적으로 포로학대를 지시했다는 언급은 없으며, 유죄판결의 근거로는 기무라 헤이타로가 버마전선 최고책임자로서 포로학대를 방지하고 감독할만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 임무를 소홀히 하였음이 언급될 뿐이다([[https://crimeofaggression.info/documents/6/1948_Tokyo_Judgment.pdf|570페이지]])[* 극동군사재판 판결문에서 기무라 헤이타로의 [[버마]] 관련 내용 원문은 다음과 같다. "그가 버마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의 군대에 적절한 군인다운 태도로 행동하고 포로들을 학대하는 것을 자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 기무라의 변호에서 촉구되었다. 포로 학대의 성격과 정도를 볼 때, 재판소는 그의 본부에서 몇 마일 안에 있는 대규모의 많은 경우에서 기무라가 전쟁 규칙을 집행하는 의무에 태만했다는 것을 발견한다다. 그러한 상황에서 육군 지휘관의 임무는 실제로 그러한 명령이 내려졌다고 하더라도 일상적인 명령의 발행만으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의무는 전쟁 범죄의 커미션 이후를 방지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며, 그러한 명령이 수행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만족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전쟁법 위반을 방지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그의 법적 의무를 고의로 무시했다.'''(It has been urged in KIMURA's defence that when he arrived in Burma he issued orders to his troops to conduct themselves in a proper soldierly manner and to refrain from ill-treating prisoners. In view of the nature and extent of the ill-treatment of prisoners, in many cases on a large scale within a few miles of his headquarters, the Tribunal finds that KIMURA was negligent in his duty to enforce the rules of war. The duty of en army commander in such circumstances is not discharged by the mere issue of routine orders, if indeed such orders were issued. His duty is to take such steps and issue such orders as will prevent thereafter the commission of war crimes and to satisfy himself that such orders are being carried out. This he did not do. Thus he deliberately disregarded his legal duty to take adequate steps to prevent breaches of the laws of war.)"]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무라 헤이타로의 버마에서의 대량학살 혐의와 이에 관련된 일화들은 사실상 전부 후대의 창작이라 봐도 무방하다. 물론, 버마에서의 대량학살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난 것과는 별개로, 전술한 것처럼 여러 전쟁들의 개전에 관여한 것과 희대의 적전도주 기록 등을 보면 긍정적인 평가가 사실상 불가능한 인물이라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으며, 심지어 극동국제군사재판 판결문에 따르면 기무라는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 일할 때에 겉으로는 군인들에게 포로 학대를 자제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실제로는 포로 학대를 방치했다고 기술된 것을 보면, 높은 위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부하들의 전쟁 범죄를 알면서도 눈감아준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다.[* 비슷하면서 다른 케이스로는 [[마쓰이 이와네]]가 있는데, 이쪽은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실질적으로 [[난징 대학살]]을 주도할 당시에는 학살을 알고 있으면서 막지 않았으나, 이쪽은 애초에 학살 당시에 [[결핵]]에 걸려 병가중이던 상황이었으니 기무라랑 비교하기에는 애매하고, 오히려 병이 나은 후 부하들에게 "이러한 잔혹 행위는 황군의 불명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기무라와 비슷한 케이스로는 [[네덜란드]]의 왕비 [[막시마 소레기에타]]의 아버지이자 악명 높은 군사독재자 [[호르헤 비델라]] 시절에 [[아르헨티나]]의 농업부 장관을 역임한 호르헤 소레기에타가 있다. 호르헤 소레기에타는 '국가 안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농업부 장관이었기에 직접적으로 반인륜적 만행을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높은 위계에 있던 특성상 비델라 정권에 반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산하 직원들이 실종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눈감아주며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방치했고, 이것 때문에 딸이 네덜란드의 왕자였던 [[빌럼알렉산더르]]와 결혼할 때 네덜란드와 아르헨티나에서 반발이 매우 거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